[로마사 03] 로마 공화정의 탄생: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와 자유의 시대
서막: 한 여인의 죽음이 바꾼 역사
기원전 509년 초여름, 로마의 하늘은 유난히 무거웠다. 티베르 강 너머로 불어오는 바람마저 숨이 막힐 듯 답답했고, 거리 곳곳에서는 시민들의 속삭임이 바람보다 빠르게 퍼져나갔다. 그 속삭임의 중심에는 한 여인의 이름이 있었다. 루크레티아.
루크레티아는 로마 귀족 사회의 모범이었다. 코라티누스의 아내이자, 덕망 높은 집안의 며느리로서 그녀의 명성은 로마 전역에 알려져 있었다. 아름다움보다는 정숙함으로, 화려함보다는 검소함으로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던 여인. 그런 그녀가 어째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까? 답은 로마의 마지막 왕가, 타르퀴니우스 가문의 악행에 있었다.
왕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의 아들 섹스투스 타르퀴니우스. 그는 권력의 그늘 뒤에 숨어 온갖 악행을 저질러왔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손아귀가 루크레티아에게 닿았다. 힘으로, 협박으로, 왕족의 권위로 그녀를 욕보인 것이다.
루크레티아는 남편과 아버지, 그리고 사촌 브루투스를 불러 자신이 당한 일을 고백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결의는 확고했다.
"나는 죄를 짓지 않았지만, 벌을 피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어떤 여자도 루크레티아를 핑계로 부정한 삶을 살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그녀는 말을 마치자마자 품에 숨겨둔 단검을 가슴 깊숙이 찔러넣었다. 붉은 피가 흘러내렸고, 그 피 한 방울 한 방울이 곧 로마 공화정의 기초석이 될 줄은 그 누구도 몰랐다.
복수의 맹세, 자유의 선언
루크레티아의 시신 앞에서 네 남자가 무릎을 었다. 남편 코라티누스, 아버지 루크레티우스, 그리고 두 명의 사촌 -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와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이 중에서도 브루투스의 반응은 특별했다.
평소 브루투스는 '둔한 자'라는 뜻의 별명을 가진 인물이었다. 왕족 앞에서는 늘 어리석은 척 행동하며 정치적 야심을 감추고 살았다. 하지만 루크레티아의 죽음 앞에서 그는 마침내 가면을 벗었다. 그는 루크레티아의 피묻은 단검을 들어올리며 신들에게 맹세했다.
"유피테르여, 그리고 로마의 모든 신들이여! 나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는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와 그의 사악한 아내, 그리고 그들의 모든 자손을 검과 불로, 그리고 내가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으로 추방할 것을 맹세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로마에 왕이 있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다른 세 남자도 같은 맹세를 했다. 피묻은 단검이 네 사람의 손을 거쳐가며, 복수의 맹세는 해방의 선언으로 바뀌었다.
브루투스는 곧바로 행동에 나섰다. 그는 루크레티아의 시신을 광장으로 옮기고 시민들을 불러모았다. 그의 웅변은 로마인들의 마음에 불을 질렀다.
"시민들이여! 보십시오. 이것이 왕의 통치가 가져다준 결과입니다. 우리의 어머니와 아내와 딸들이 왕족의 욕망 앞에 무력합니다. 우리의 재산은 그들의 탐욕을 채우는 수단일 뿐이고, 우리의 목숨은 그들의 변덕에 달려있습니다. 이제 끝내야 합니다. 로마는 더 이상 왕을 섬기지 않을 것입니다!"
로마 시민들의 분노는 폭발했다. 그들은 브루투스를 따라 왕궁으로 향했고,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는 성 밖으로 도망쳤다. 로마 역사상 마지막 왕의 도주였다.
새로운 실험: 공화정의 설계
왕을 몰아낸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이제 브루투스는 더 어려운 과제에 직면했다. 왕 없는 로마를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
브루투스는 깊이 고민했다. 왕정의 문제점은 명확했다. 한 사람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되고, 그 권력이 영구적이며, 견제받지 않는다는 것. 따라서 새로운 체제는 이 세 가지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그의 해답은 혁신적이었다. 첫째, 권력을 분산시키자.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여러 기관이 권력을 나누어 갖자. 둘째, 임기를 제한하자. 아무리 훌륭한 지도자라도 권력을 영구히 갖지 못하게 하자. 셋째, 상호 견제를 가능하게 하자. 한 사람의 독단적 결정을 다른 사람이 막을 수 있게 하자.
이러한 원칙 하에 탄생한 것이 집정관(consul) 제도였다. 왕 대신 두 명의 집정관이 1년 임기로 국가를 다스리게 했다. 이들은 왕과 비슷한 권한을 가졌지만, 결정적 차이가 있었다. 한 명의 집정관이 내린 결정을 다른 집정관이 거부(veto)할 수 있었던 것이다.
브루투스는 최초의 집정관 중 한 명이 되었다. 그의 동료는 코라티누스였다. 하지만 코라티누스는 타르퀴니우스 가문과 혈연관계에 있다는 이유로 시민들의 의심을 받았고, 결국 자진해서 사임했다. 그의 후임으로는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가 선출되었다.
원로원: 지혜와 경험의 보고
집정관 제도만으로는 국가를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어려웠다. 1년이라는 짧은 임기, 군사 작전 중 의견 충돌의 위험성, 장기적 정책 수립의 어려움 등 여러 문제가 있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브루투스는 기존의 원로원(senatus)을 적극 활용했다.
원로원은 왕정 시대부터 존재했던 기관이었다. '원로(senator)'라는 말 자체가 '나이든 사람'을 뜻하듯, 이들은 로마의 전통적 지배층인 파트리키(patricii, 귀족) 출신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대대로 로마를 이끌어온 가문의 후예들로, 정치적 경험과 사회적 권위를 갖추고 있었다.
공화정 하에서 원로원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졌다. 형식적으로는 자문기관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국가의 최고 의사결정기구였다. 집정관들은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 전에 반드시 원로원의 의견을 구했고, 원로원의 결의(senatus consultum)는 강력한 구속력을 가졌다.
원로원은 외교 정책, 재정 관리, 법률 제정, 종교적 사안 등 국가의 모든 중요 사안에 관여했다. 특히 대외 관계에서는 사실상 독점적 권한을 가졌다. 다른 나라와의 조약 체결, 전쟁 선포, 외국 사절 접견 등은 모두 원로원의 권한이었다.
하지만 원로원이 만능은 아니었다. 이들은 법을 직접 제정할 수는 없었다. 법률 제정권은 민회(comitia)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원로원의 결의도 집정관이 거부할 수 있었다. 물론 실제로는 집정관이 원로원에 맞서는 경우가 드물었지만, 제도적으로는 견제 장치가 존재했다.
민회: 시민 주권의 출발점
로마 공화정의 세 번째 축은 민회였다. 이는 로마 시민들이 직접 참여하는 정치 기구로, 현대 민주주의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초기 민회는 우리가 생각하는 민주적 기구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민회는 여러 종류가 있었다. 쿠리아 민회(comitia curiata)는 가장 오래된 형태로, 종교적 성격이 강했다. 켄투리아 민회(comitia centuriata)는 군사 조직을 기반으로 한 것으로, 집정관 선출과 중요한 법률 제정을 담당했다. 나중에는 트리부스 민회(comitia tributa)도 등장했다.
이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켄투리아 민회였다. 이는 로마 시민을 재산에 따라 계급으로 나누고, 각 계급을 다시 연령에 따라 켄투리아(centuria, 백인대)로 구분한 것이었다. 투표는 개인이 아니라 켄투리아 단위로 이루어졌는데, 여기서 문제가 있었다.
부유한 계급의 켄투리아 수가 가난한 계급보다 훨씬 많았던 것이다. 예를 들어, 최고 계급인 1등급은 80개의 켄투리아를 가졌지만, 최하 계급인 5등급은 30개에 불과했다. 더구나 투표는 1등급부터 시작해서 과반수가 나오면 중단되었기 때문에, 하위 계급은 투표할 기회조차 없는 경우가 많았다.
그럼에도 민회의 존재는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적어도 명목상으로는 모든 시민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이 열렸고, 권력의 정당성이 시민의 동의에서 나온다는 원칙이 확립되었다. 이는 왕정과의 근본적 차이였다.
브루투스의 시련: 아들들의 배신
공화정 수립 후 브루투스가 겪은 가장 큰 시련은 뜻밖의 곳에서 왔다. 바로 그의 두 아들, 티투스와 티베리우스가 왕정 복고 음모에 가담한 것이었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는 에트루리아에서 복권을 노리고 있었다. 그는 로마 내부의 불만 세력과 접촉하여 쿠데타를 계획했고, 여기에 브루투스의 아들들이 가담했다. 젊은 귀족들 중 일부는 왕정 시대의 특권을 그리워했고, 새로운 체제에서 자신들의 지위가 불안하다고 느꼈던 것이다.
음모는 발각되었다. 브루투스는 집정관으로서 재판을 주재해야 했다. 피고인은 다름 아닌 자신의 두 아들이었다. 로마 시민들은 숨을 죽이고 지켜보았다. 과연 아버지가 자식을 단죄할 수 있을까?
브루투스는 말없이 재판을 진행했다. 증거는 명확했고, 죄는 중대했다. 국가 전복 음모. 그 형벌은 죽음이었다. 마침내 판결의 순간이 왔다. 브루투스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법에 따라... 죽음으로 처한다."
그는 아들들의 처형을 지켜보았다.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지만, 그의 얼굴은 돌처럼 굳어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냉혹하다고 했지만, 또한 존경했다. 공화국의 아버지가 사적 감정보다 공적 의무를 선택한 순간이었다.
발레리우스의 지혜: 포풀루스의 집정관
브루투스의 동료 집정관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는 또 다른 위기에 직면했다. 시민들이 그를 의심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가 팔라티우스 언덕에 웅장한 저택을 짓고 있었는데, 이것이 왕정 복고의 신호가 아니냐는 소문이 퍼졌다.
발레리우스는 즉시 대응했다. 그는 공사를 중단하고 저택을 헐어버렸다. 그리고 시민들 앞에서 연설했다.
"시민들이여, 나는 여러분의 의심을 이해합니다. 자유를 위해 싸운 우리가 다시 전제정으로 돌아가는 것을 경계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나는 여러분의 의심을 해소하기 위해 이 저택을 헐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어떤 집정관도 시민들보다 높은 곳에 살지 못하도록 법을 제정하겠습니다."
그는 말한 대로 했다. 발레리아 법이 제정되어, 집정관의 거주지는 포룸보다 높은 곳에 있을 수 없게 되었다. 또한 그는 시민들의 상소권을 인정하는 법도 만들었다. 집정관의 판결에 불복하는 시민은 민회에 상소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이러한 조치들로 발레리우스는 시민들의 신뢰를 회복했다. 사람들은 그를 '포풀리콜라(Publicola)', 즉 '인민의 친구'라고 불렀다. 이 별명은 그의 후손들에게까지 이어졌다.
왕정의 유산: 종교와 상징
공화정 수립자들은 왕정의 정치적 측면은 철저히 거부했지만, 종교적 전통은 보존했다. 로마인들에게 종교는 정치와 분리될 수 없는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왕이 수행하던 종교적 의무는 렉스 사크로룸(rex sacrorum)이라는 새로운 직책이 맡게 되었다. '제사의 왕'이라는 뜻의 이 직책은 왕의 종교적 권한만을 계승한 것으로, 정치적 권력은 전혀 갖지 않았다. 오히려 렉스 사크로룸은 다른 공직을 겸할 수 없었고, 민회에서 연설할 수도 없었다. 철저히 종교적 역할로만 제한된 것이다.
또한 왕정 시대의 상징들은 철저히 배척되었다. 왕관, 왕좌, 자주색 토가 등은 모두 금지되었다. 심지어 '렉스(rex)'라는 단어 자체가 금기어가 되었다. 누군가를 왕이라고 부르는 것만으로도 큰 모욕이 되었고, 왕이 되려 한다는 의심을 받는 것은 정치적 죽음을 의미했다.
하지만 집정관들은 왕의 일부 상징은 계승했다. 파스케스(fasces)라고 불리는 막대기 다발을 든 경호원들, 리크토르(lictor)는 여전히 집정관을 호위했다. 다만 로마 시내에서는 파스케스에서 도끼를 제거해야 했다. 이는 시민에 대한 생사여탈권이 제한됨을 상징했다.
초기 공화정의 도전과 위기
공화정 초기는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내부적으로는 귀족과 평민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었고, 외부적으로는 에트루리아 왕들과 라틴 동맹국들의 위협이 계속되었다.
특히 포르세나(Porsenna) 왕이 이끄는 에트루리아군의 침입은 로마를 극한 상황으로 몰아넣었다. 포르세나는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의 복권을 명분으로 로마를 공격했고, 한때 도시를 점령하기 직전까지 갔다. 이때 호라티우스 코클레스가 다리를 지키며 적군을 막은 일화는 로마인들의 자랑이 되었다.
또 다른 위기는 사비니족과의 전쟁이었다. 이 전쟁에서 브루투스는 사비니족 지휘관과 일대일 결투를 벌이다가 상대방과 함께 전사했다. 공화정의 아버지는 이렇게 전장에서 생을 마감했다.
평민들의 각성: 신분투쟁의 서막
공화정 수립 당시 실질적 권력은 여전히 파트리키(귀족)들이 독점하고 있었다. 집정관, 원로원의원은 모두 귀족 출신이었고, 종교적 직책들도 마찬가지였다. 플레브스(평민)들은 명목상으로는 시민이었지만, 실질적 정치 참여는 극히 제한적이었다.
더 심각한 문제는 법률이 성문화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법의 해석과 적용은 전적으로 귀족 출신 관료들의 재량에 달려 있었고, 평민들은 언제 어떤 처벌을 받을지 예측할 수 없었다. 부채 문제도 심각했다. 전쟁이 잦아지면서 많은 평민들이 경제적 어려움에 빠졌고, 부채를 갚지 못한 평민은 채무노예가 되기도 했다.
이러한 불만이 누적되면서 평민들의 조직적 저항이 시작되었다. 기원전 494년 첫 번째 세세시오(secessio), 즉 '분리'가 일어났다. 평민들이 로마를 떠나 인근 산으로 집단 이주한 것이다. 군대의 주력인 평민들이 빠지자 로마는 마비상태에 빠졌다.
결국 귀족들은 타협해야 했다. 평민 호민관(tribunus plebis)이라는 새로운 직책이 창설되었다. 이들은 평민의 이익을 대변하고, 다른 관료들의 결정을 거부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다. 이것이 로마 역사상 유명한 '신분투쟁(Conflict of the Orders)'의 시작이었다.
공화정 체제의 완성을 향하여
브루투스와 초기 공화정 지도자들이 만든 체제는 아직 미완성이었다. 권력 구조의 기본 틀은 갖추어졌지만, 세부적인 제도들은 앞으로 수백 년에 걸쳐 발전해야 했다. 특히 평민과 귀족 사이의 갈등 해결, 법의 성문화, 새로운 관직들의 창설 등은 모두 미래의 과제였다.
하지만 이들이 확립한 기본 원칙들은 변하지 않았다. 권력의 분산, 임기의 제한, 상호 견제라는 삼대 원칙은 로마 공화정의 DNA가 되었다. 이 원칙들은 때로는 비효율을 낳기도 했지만, 전제정으로의 회귀를 막는 안전장치 역할을 했다.
또한 법치주의의 개념도 뿌리를 내렸다. 비록 초기에는 불완전했지만, '법 앞에서는 모든 시민이 평등하다'는 이상은 점차 현실이 되어갔다. 시민권의 개념도 확장되었다. 로마 시민이라는 정체성은 출생지나 혈통보다는 법적 지위에 기반한 것이었고, 이는 후에 로마 제국의 통합 원리가 되었다.
역사의 평가: 혁명인가, 진화인가?
기원전 509년의 사건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일부 역사가들은 이를 '혁명'이라고 부른다. 왕정에서 공화정으로의 전환은 분명 체제의 근본적 변화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역사가들은 '진화'에 가깝다고 본다. 실질적 권력 구조는 크게 바뀌지 않았고, 지배층도 동일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진실은 그 중간 어디인가에 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브루투스와 그의 동료들이 만든 변화가 로마사에, 나아가 인류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실험한 공화정 체제는 후에 많은 나라들의 모델이 되었고, 현대 민주주의의 원형이 되었다.
브루투스의 유산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는 공화정 수립 후 불과 몇 년 만에 전사했지만, 그의 유산은 로마 역사 전체를 관통했다. 그의 후손들은 대대로 '브루투스'라는 이름을 이어받으며 공화정의 수호자를 자처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이 바로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암살한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였다.
카이사르 암살 당시 마르쿠스 브루투스는 "조상의 영예를 생각하라"는 낙서를 받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카이사르를 죽인 후 그가 외친 말도 "로마여, 다시 자유로워져라!"였다. 그에게 카이사르 암살은 조상 브루투스의 업적을 재현하는 행위였던 것이다.
하지만 역사의 아이러니는 여기에 있다. 초대 브루투스가 세운 공화정은 결국 제정으로 바뀌었고, 후손 브루투스의 암살은 오히려 그 전환을 가속화했다. 카이사르의 죽음은 아우구스투스의 제정 수립을 위한 발판이 되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