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사02] 로마 왕정 시대: 신화에서 역사로, 일곱 왕의 시대
기원전 8세기 중엽, 티베르 강 유역의 일곱 언덕 위에 한 도시가 태어났다. 전설에 따르면 트로이 왕자 아이네아스의 후손인 쌍둥이 형제 로물루스와 레무스가 세운 이 도시는, 처음부터 운명적인 비극을 품고 있었다. 형제간의 다툼으로 레무스가 죽고, 로물루스 혼자 남아 이 도시의 이름을 자신의 이름을 따서 '로마(Roma)'라고 명명했다. 하지만 이는 단순한 건국 신화가 아니다.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우리는 실제로 기원전 8세기경 팔라티누스 언덕에 정착촌이 형성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로마의 왕정 시대(기원전 753-509년)는 단순히 일곱 명의 왕이 차례로 통치한 시기가 아니라, 하나의 작은 도시국가가 이탈리아 반도의 패자로 성장할 수 있는 모든 기반이 마련된 결정적인 시기였다. 이 시대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훗날 지중해를 호령한 로마 제국의 위대함을 온전히 파악할 수 없다.
1장: 로물루스 - 피와 영광으로 쌓은 첫 번째 왕좌
도시의 창건자이자 최초의 입법자
로물루스(기원전 753-717년 재위)는 단순히 로마를 세운 자가 아니라, 한 문명의 DNA를 설계한 인물이었다. 그는 새로운 도시에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 혁신적인 정책을 펼쳤다. 당시 다른 도시국가들이 혈통과 출신을 중시했다면, 로물루스는 아실룸(asylum) 제도를 도입했다. 이는 팔라티누스와 카피톨리누스 언덕 사이 움푹한 곳을 피난처로 지정하여, 타 지역에서 온 탈주 노예, 죄인, 유랑민, 추방자 모두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는 파격적인 정책이었다.
리비우스는 이에 대해 "이것이야말로 로마가 위대해진 최초의 씨앗이었다"고 기록한다. 실제로 이 정책은 로마가 다른 고대 도시국가들과 구별되는 핵심적 특징을 만들어냈다. 혈통주의가 아닌 실용주의, 폐쇄성이 아닌 개방성, 이것이 바로 훗날 로마가 온 세계를 품을 수 있었던 근본적 토대였다.
사비니 여인들의 납치: 전쟁에서 동맹으로
하지만 남성 인구만으로는 도시의 지속가능한 발전이 불가능했다. 로물루스는 인근 부족들에게 정당한 통혼을 제안했으나 모두 거절당했다. 그들은 로마를 "도적들의 소굴"이라며 멸시했기 때문이다. 이에 로물루스는 넵투누스 에퀘스테르 축제를 빌미로 사비니족을 초청한 뒤, 축제 도중 계획적으로 사비니 여인들을 납치했다.
이 사건은 단순한 야만적 행위로 치부될 수 없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로물루스는 납치된 여인들에게 "폭력이 아닌 사랑으로 결합하자"며 정당한 결혼의 지위를 보장했고, 실제로 대부분의 사비니 여인들이 로마 남성들과 진정한 부부가 되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후속 전쟁에서 사비니 여인들이 자신의 친정아버지와 남편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그들은 "이제 우리는 로마의 어머니"라고 선언하며 두 부족의 융합을 이끌어냈다.
최초의 정치 제도 설계
로물루스는 또한 로마 최초의 정치 제도를 설계했다. 그는 백 명의 원로원(Senatus)을 구성하여 자신의 조언기구로 삼았다. 'Senatus'라는 명칭은 'senex(노인)'에서 파생된 것으로, 지혜와 경험을 중시하는 로마인의 가치관을 반영한다. 또한 그는 시민들을 30개의 쿠리아(Curiae)로 나누어 군사 조직과 정치 참여의 기본 단위로 삼았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그의 군사 개혁이다. 로물루스는 시민군(citizen-soldier) 개념을 도입하여, 모든 자유민이 필요시 군인이 될 수 있도록 했다. 이는 전문 군인에 의존하던 다른 고대 국가들과 차별화되는 혁신이었고, 훗날 로마 군단의 강력함의 기원이 되었다.
신화에서 신으로
로물루스의 죽음은 그 자체로 로마인의 운명관을 보여준다. 어느 날 캄푸스 마르티우스에서 군사 검열을 하던 중 갑작스런 폭풍이 일어났고, 구름과 번개 속에서 로물루스가 사라졌다. 로마인들은 그가 하늘로 승천하여 퀴리누스(Quirinus) 신이 되었다고 믿었다. 이는 단순한 미신이 아니라, 로마인들이 자신들의 도시와 지도자를 신성시하는 종교적 전통의 시작이었다.
2장: 일곱 왕의 시대 - 문명의 기초를 다지다
누마 폼필리우스 (기원전 717-673년): 법과 종교의 아버지
로물루스 이후 40년간 공위 기간이 있었다는 설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사비니족 출신의 누마 폼필리우스가 두 번째 왕으로 선출되었다고 전해진다. 로물루스가 전쟁과 확장의 왕이었다면, 누마는 평화와 문명화의 왕이었다.
누마의 가장 큰 업적은 로마의 종교 체계 확립이다. 그는 물의 님프 에게리아로부터 신적 영감을 받았다고 주장하며, 로마의 모든 종교 의식과 제사 규정을 체계화했다. 베스타 신전을 건립하고 베스타 여신관 제도를 만든 것도 그의 작품이다. 베스타 여신관들은 30년간 처녀성을 지키며 성화를 관리해야 했는데, 이 성화가 꺼지면 로마가 멸망한다고 믿어졌다.
또한 그는 로마 최초의 달력을 제정했다. 원래 로물루스 시대에는 10개월짜리 달력을 사용했으나, 누마는 야누스와 페브루아리우스 두 달을 추가하여 12개월 354일의 태음력을 만들었다. 비록 후에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해 개혁되긴 했지만, 이는 로마 문명사에서 중요한 진전이었다.
누마는 또한 로마 최초의 성문법 체계를 구축했다. 그의 법령집은 후에 십이표법의 기초가 되었으며, 특히 계약법과 종교법 분야에서 혁신적이었다. 키케로는 "누마가 없었다면 로마는 영원히 야만국가로 남았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툴루스 호스틸리우스 (기원전 673-642년): 정복의 칼날
세 번째 왕 툴루스 호스틸리우스는 누마와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의 이름 'Hostilius'는 '적대적인'이라는 뜻으로, 그의 호전적 성격을 잘 보여준다. 그는 "평화는 남자를 연약하게 만든다"고 믿었으며, 끊임없는 전쟁을 통해 로마의 영토를 확장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업적은 알바 롱가 정복이다. 알바 롱가는 로마의 모시(母市)로 여겨지는 도시였기 때문에, 이 정복은 상징적 의미가 컸다. 흥미롭게도 두 도시는 전면전 대신 각각 삼형제를 선발하여 대표 결투를 벌이기로 했다. 로마 측에서는 호라티우스 삼형제, 알바 롱가 측에서는 쿠리아티우스 삼형제가 출전했다.
결투에서 호라티우스 삼형제 중 막내만 살아남았지만, 그는 전략적으로 적을 분산시킨 뒤 하나씩 처치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이 승리 이후 알바 롱가의 모든 주민이 로마로 이주했고, 로마의 인구는 두 배로 늘어났다. 더불어 알바 롱가의 귀족들이 로마 원로원에 편입되면서 로마의 정치 구조도 더욱 복잡해졌다.
툴루스는 또한 로마 최초의 원형경기장인 서커스 막시무스의 원형을 건설했다. 처음에는 목재로 된 간이 관람석이었지만, 이후 25만 명을 수용하는 거대한 경기장으로 발전했다.
안쿠스 마르키우스 (기원전 642-617년): 상업과 외교의 개척자
네 번째 왕 안쿠스 마르키우스는 누마의 외손자로, 할아버지의 평화주의와 툴루스의 현실주의를 결합한 지도자였다. 그는 "전쟁은 마지막 수단"이라는 원칙 하에 외교를 중시했지만, 필요시에는 과감한 군사 행동도 주저하지 않았다.
안쿠스의 가장 큰 업적은 로마 최초의 항구 도시 오스티아(Ostia) 건설이다. 티베르 강 하구에 위치한 오스티아는 로마가 해상 무역에 진출할 수 있는 관문 역할을 했다. 이는 로마가 단순한 내륙 농업 도시에서 지중해 상업 네트워크에 참여하는 국제 도시로 발전하는 전환점이었다.
또한 그는 로마 최초의 감옥인 마메르티나 감옥을 건설했고, 야니쿨룸 언덕을 로마 영토에 편입시켜 도시의 방어력을 강화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그의 시민권 정책이다. 정복한 라틴족 공동체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여 동맹관계를 구축했는데, 이는 훗날 로마의 이탈리아 통일 전략의 원형이 되었다.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 (기원전 616-579년): 에트루리아의 웅장함
다섯 번째 왕부터는 에트루리아계 왕들의 시대가 시작된다.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는 에트루리아의 타르퀴니이 출신으로, 본명은 루쿠몬이었다. 그는 코린토스 출신 아버지와 에트루리아 귀족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혼혈이라는 이유로 고향에서 차별받자 로마로 이주했다.
그의 재위 기간은 로마 역사상 가장 화려한 건설 붐의 시대였다. 그는 에트루리아의 선진 기술과 자본을 바탕으로 로마를 근본적으로 탈바꿈시켰다. 가장 유명한 업적은 로마 최대의 하수도인 클로아카 막시마(Cloaca Maxima) 건설이다. 이 하수도는 도시의 습지를 건조시켜 포룸 로마눔을 조성할 수 있게 했으며, 현재까지도 일부가 사용되고 있다.
또한 그는 카피톨리누스 언덕에 주피터 옵티무스 막시무스 신전 건설을 시작했다. 이 신전은 로마 종교의 최고 성소로, 집정관 취임식과 개선식의 종착점이었다. 신전 설계 자체가 에트루리아 양식을 따랐으며, 테라코타 조각상들도 에트루리아 장인들이 제작했다.
프리스쿠스는 또한 로마 최초의 경마장인 서커스 막시무스를 본격적으로 확장했고, 에트루리아식 검투사 경기를 로마에 도입했다. 이러한 대중 오락은 후에 로마 제국의 상징이 되었다.
세르비우스 툴리우스 (기원전 578-535년): 민주주의의 전조
여섯 번째 왕 세르비우스 툴리우스는 로마 역사상 가장 진보적인 개혁을 단행한 인물이다. 그의 출생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노예 출신이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이는 로마 사회의 사회적 이동성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다.
세르비우스의 가장 혁신적인 개혁은 인구조사(Census) 제도 도입이다. 그는 모든 로마 시민의 재산과 나이를 조사하여 193개 센투리아(centuria)로 분류했다. 이는 단순히 군사 조직이 아니라 정치 참여의 새로운 기준이었다. 혈통이 아닌 재산에 따라 정치적 권리가 결정되는 일종의 '금권주의' 시스템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민들에게 정치 참여의 길을 열어준 혁신적 제도였다.
또한 그는 로마의 영토를 대폭 확장했다. 세르비우스 성벽(Servian Wall)이라 불리는 새로운 성벽을 축조하여 기존의 팔라티누스 언덕 중심의 로마를 일곱 언덕 전체를 포괄하는 대도시로 확장했다. 이 성벽의 둘레는 11킬로미터에 달했으며, 당시 기준으로는 지중해 세계 최대 규모였다.
세르비우스는 또한 로마 최초의 신분 상승 경로를 제도화했다. 해방 노예와 그 자손들이 시민권을 획득할 수 있는 길을 열었고, 라틴족 동맹시들과의 통혼을 허용했다. 이는 로마가 다민족 제국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 (기원전 535-509년): 영광과 몰락
마지막 왕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는 '교만한 자'라는 뜻의 별명처럼 전제군주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는 장인 세르비우스 툴리우스를 살해하고 왕위를 찬탈했으며, 재위 기간 내내 원로원과 시민들을 무시한 채 독단적으로 통치했다.
하지만 그의 치세가 단순히 폭정만으로 점철된 것은 아니다. 그는 여러 중요한 건설 사업을 완성했다. 아버지 프리스쿠스가 시작한 주피터 신전을 완공했고, 클로아카 막시마를 확장했으며, 서커스 막시무스를 대규모로 개축했다. 또한 그는 적극적인 대외 확장 정책을 펼쳐 라틴족 도시들을 복속시키고 볼스키족과 아이퀴족을 제압했다.
수페르부스의 몰락은 정치적 실정보다는 도덕적 타락에서 비롯되었다. 그의 아들 섹스투스 타르퀴니우스가 저지른 루크레티아 겁탈 사건은 로마 사회 전체를 분노로 들끓게 했다. 루크레티아는 명문 귀족 콜라티누스의 아내로, 남편이 전쟁터에 나간 사이 왕자에게 겁탈당했다. 그녀는 가족들에게 사실을 고백한 뒤 "내 몸은 더럽혀졌지만 내 마음은 순결하다"는 말을 남기고 자결했다.
이 사건은 단순한 개인적 비극을 넘어 왕정 체제 전체에 대한 거부감으로 이어졌다. 루크레티아의 사촌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가 시민들 앞에서 "다시는 왕을 두지 않겠다"고 맹세했고, 이것이 로마 공화정의 출발점이 되었다.
3장: 에트루리아의 그림자 - 문명의 전수자들
신비한 해양 민족의 유산
로마 왕정 후기를 지배한 에트루리아인들은 고대 이탈리아 반데 가장 선진적인 문명을 구축한 민족이었다. 그들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헤로도토스는 그들이 소아시아 리디아에서 온 이주민이라 했고, 디오니시오스는 이탈리아 토착민이라 주장했다. 현대 유전학 연구는 두 설 모두에 일정한 근거가 있음을 보여준다.
에트루리아인들은 기원전 8세기부터 이미 철기 문명을 발달시켰고, 지중해 전역과 교역을 벌였다. 그들의 도시들 - 타르퀴니아, 체르베테리, 볼테라, 아레초 등 - 은 각각 독립적인 도시국가였지만, 종교적 연맹체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들은 그리스 문명의 영향을 받아 독특한 문화를 발전시켰다.
로마에 전해진 에트루리아의 선물들
에트루리아가 로마에 미친 영향은 실로 지대했다. 우선 종교 분야에서 에트루리아의 점술(haruspices)이 로마에 도입되었다. 희생된 동물의 간을 보고 미래를 예측하는 이 기술은 로마 종교의 핵심 요소가 되었고, 중요한 국가적 결정 시마다 활용되었다.
건축 분야에서도 에트루리아의 영향은 결정적이었다. 로마의 대표적 건축 양식인 아치(arch) 구조는 에트루리아에서 전해진 것이다. 클로아카 막시마의 아치형 터널, 주피터 신전의 기단 구조 모두 에트루리아 기술의 산물이었다. 또한 아트리움(atrium)이 있는 로마식 주택 구조도 에트루리아에서 유래했다.
정치 제도 면에서도 에트루리아의 흔적은 뚜렷하다.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파스케스(fasces) - 도끼와 막대기를 묶은 권력의 상징 - 는 에트루리아에서 전해진 것이다. 이는 후에 로마 집정관의 권위를 상징하는 도구가 되었고, 현재도 미국 하원 의사당 등에서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다.
문화적 세련미의 전수
에트루리아인들은 그리스인들에 비해 여성의 지위가 높았고, 이는 로마 사회에도 영향을 미쳤다. 에트루리아 여성들은 공개적으로 연회에 참석할 수 있었고, 독립적인 경제 활동도 가능했다. 이는 그리스의 여성 격리 문화와는 대조적이었다.
또한 에트루리아인들은 뛰어난 금속공예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들이 제작한 청동 거울, 장신구, 무기류는 지중해 전역에서 명성을 얻었다. 로마의 초기 화폐도 에트루리아 기술자들이 제작했으며, 이는 로마가 상업 도시로 발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4장: 루크레티아의 죽음 - 자유의 씨앗이 뿌려지다
한 여인의 죽음이 바꾼 역사
기원전 509년의 어느 봄날, 로마 역사상 가장 극적인 전환점이 찾아왔다. 그 중심에는 한 여인의 비극적 죽음이 있었다. 루크레티아는 콜라티누스 타르퀴니우스의 아내로, 로마 최고 귀족층에 속하는 여성이었다. 그녀의 남편은 왕족과 가까운 친척이었지만, 그것이 오히려 비극의 씨앗이 되었다.
사건의 발단은 아르데아 공성전에서 시작되었다. 수페르부스 왕과 그의 아들들, 그리고 몇몇 젊은 귀족들이 적군을 포위한 채 장기간 대치하고 있을 때였다. 어느 저녁 술자리에서 각자 아내의 덕목을 자랑하던 중, 콜라티누스가 자신의 아내 루크레티아야말로 가장 현숙하다고 주장했다. 이에 왕자 섹스투스 타르퀴니우스가 "그럼 직접 확인해보자"고 제안했다.
현숙한 아내와 타락한 왕자
일행은 각자의 집을 불시에 방문했다. 다른 귀족들의 아내들은 모두 연회를 벌이거나 놀이에 빠져 있었지만, 루크레티아만은 밤늦은 시간에도 시녀들과 함께 양털을 뽑으며 남편을 위한 옷을 짜고 있었다. 이 모습을 본 섹스투스는 루크레티아의 미모와 덕성에 동시에 매혹되었다.
며칠 후 섹스투스는 홀로 콜라티아를 재방문했다. 루크레티아는 왕자를 정중히 맞이했고 최고의 대접을 했다. 하지만 밤중에 섹스투스는 검을 들고 루크레티아의 침실에 침입했다. 그는 루크레티아에게 두 가지 선택지를 제시했다: 자신의 요구에 응하거나, 아니면 그녀를 죽이고 노예와 간통했다고 조작하겠다는 것이었다.
루크레티아는 죽음보다 명예를 택하려 했지만, 가문의 명예가 더럽혀질 것을 우려해 결국 굴복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더 큰 계획이 있었다.
복수의 맹세, 자유의 선언
다음 날 새벽, 루크레티아는 로마에 있는 아버지 스푸리우스 루크레티우스와 아르데아에 있는 남편에게 긴급히 사람을 보내 만나자고 했다. 그들은 각각 한 명의 친구를 데리고 왔는데, 루크레티우스는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를, 콜라티누스는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를 동반했다.
브루투스는 특별한 인물이었다. 그는 수페르부스 왕의 조카였지만, 일찍이 왕이 자신의 형을 죽인 것을 목격한 후 바보인 척 연기하며 살아남았다. '브루투스(Brutus)'라는 이름 자체가 '우둔한 자'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예리한 지성과 깊은 정치적 통찰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루크레티아는 네 사람 앞에서 전날 밤의 일을 자세히 털어놓았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내 몸은 더럽혀졌지만 내 마음은 순결하다. 죽음이 내 순결을 증명할 것이다. 하지만 당신들은 맹세하라. 섹스투스 타르퀴니우스가 이 죄에 대한 응보를 받지 않은 채로 살아가지 못하도록."
그 말을 마치자마자 루크레티아는 품에 숨겨둔 단검으로 자신의 심장을 찔렀다. 모든 이가 경악하는 가운데, 브루투스가 그 단검을 뽑아 들고 맹세했다: "이 순결한 피에 맹세하노니,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와 그의 사악한 아내, 그리고 그들의 모든 혈족을 추방할 것이며, 다시는 그 누구도 로마의 왕이 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혁명의 불길이 타오르다
브루투스의 선언은 단순한 개인적 복수를 넘어선 정치적 혁명의 신호탄이었다. 그는 곧바로 루크레티아의 시신을 로마로 운반하여 포룸 로마눔에서 시민들에게 공개했다. 그의 웅변은 로마 시민들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시민들이여! 이것이 우리가 왕이라고 부르는 자들의 진면목이다! 한 순결한 여인이 왕족의 욕망 때문에 죽어야 했다. 이는 단순히 한 가정의 비극이 아니다. 이는 우리 모두의 아내와 딸들이 직면할 수 있는 위험이다. 폭군의 통치 하에서는 그 누구도, 그 어떤 덕성도 안전할 수 없다!"
시민들의 분노는 즉각적이었다. 평소 왕의 폭정에 불만을 품고 있던 귀족들뿐만 아니라 평민들까지도 왕정 폐지에 찬성했다. 더욱이 수페르부스와 그의 아들들이 아르데아 공성전에 참여 중이어서 로마에 없다는 점이 혁명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5장: 공화정의 새벽 - 왕이 사라진 도시의 새로운 실험
최초의 집정관들과 새로운 질서
기원전 509년, 로마는 인류 역사상 가장 혁신적인 정치 실험을 시작했다. 왕 대신 두 명의 집정관(Consul)이 1년 임기로 공동 통치하는 시스템이었다. 이는 권력의 집중을 방지하고 견제와 균형을 보장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최초의 집정관으로는 혁명을 주도한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와 루크레티아의 남편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콜라티누스가 선출되었다. 하지만 콜라티누스는 타르퀴니우스라는 성씨 때문에 시민들의 의심을 받았고, 결국 자진해서 로마를 떠났다. 그의 후임으로는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푸블리콜라가 선출되었다.
발레리우스의 별명 '푸블리콜라(Publicola)'는 '민중의 친구'라는 뜻으로, 그가 얼마나 민주적 성향이 강했는지를 보여준다. 그는 집정관의 권한을 제한하는 여러 법안을 통과시켰다. 특히 중요한 것은 시민이 집정관의 판결에 불복할 경우 민회에 상소할 수 있는 '프로보카티오(provocatio)' 권리를 보장한 것이었다.
혁명의 시련: 왕정 복귀 음모
하지만 새로운 체제는 곧바로 심각한 도전에 직면했다. 추방된 타르퀴니우스 가문은 왕정 복귀를 위해 끊임없이 음모를 꾸몄다.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브루투스 자신의 아들들이 왕정 복귀 음모에 가담한 것이었다.
브루투스의 두 아들 티투스와 티베리우스는 아퀼리우스 형제와 함께 타르퀴니우스 왕과 비밀리에 연락을 취하며 반란을 계획했다. 하지만 이 음모는 발각되었고, 브루투스는 공화정의 창건자로서 가장 고통스러운 선택을 해야 했다. 그는 공개 재판에서 자신의 아들들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직접 집행을 지켜봤다.
플루타르코스는 이 장면을 이렇게 묘사한다: "아버지의 얼굴에는 그 어떤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마치 돌로 조각된 상처럼 굳어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은 멈출 수 없었다."
이 사건은 로마 공화정의 핵심 가치를 보여준다. 개인적 감정보다 공익이 우선하며, 법 앞에서는 그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원칙이었다. 이는 훗날 로마가 거대한 제국을 통치할 수 있었던 제도적 기반이 되었다.
포르세나의 침공과 로마의 영웅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는 에트루리아의 왕 라르스 포르세나를 설득하여 로마를 침공했다. 포르세나는 당시 에트루리아 연맹의 가장 강력한 지도자였으며, 그의 군대는 로마를 압도할 만한 규모였다.
이 위기 상황에서 로마인들의 영웅적 면모가 드러났다. 가장 유명한 일화는 호라티우스 코클레스의 이야기다. 그는 동료 두 명과 함께 티베르 강의 유일한 다리인 수블리키우스 다리를 지켰다. 동료들이 다리를 끊는 동안 그 혼자서 에트루리아 대군을 상대했고, 다리가 끊어지자 갑옷을 입은 채로 강에 뛰어들어 헤엄쳐서 돌아왔다.
또 다른 영웅은 무키우스 스카이볼라였다. 그는 포르세나를 암살하려다가 실패했지만, 체포된 후 자신의 오른손을 불에 태우며 "로마인들은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이에 감동한 포르세나는 그를 석방했고, 무키우스는 '스카이볼라(왼손잡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새로운 제도의 정착
포르세나와의 전쟁이 끝난 후 로마는 공화정 체제를 더욱 정교하게 다듬어 나갔다. 집정관 외에도 여러 관직이 신설되었다. 프라이토르(법무관)는 사법 업무를, 퀘스토르(재무관)는 재정 관리를, 아이딜레스(시장관)는 도시 행정을 담당했다.
특히 중요한 것은 독재관(dictator) 제도였다. 국가 비상시에 6개월 한정으로 절대 권력을 가진 독재관을 임명할 수 있었는데, 이는 민주주의와 효율성을 조화시키려는 로마인들의 지혜였다. 초대 독재관으로는 티투스 라르키우스가 임명되었다.
원로원의 역할도 왕정 시대와는 크게 달라졌다. 왕의 자문기구에서 공화정의 핵심 권력기관으로 변모했다. 원로원 의원은 종신직이었고, 전직 고위 관리들로 구성되어 경험과 지혜를 바탕으로 국정을 운영했다.
평민과 귀족의 갈등: 새로운 도전
하지만 공화정 초기의 가장 큰 문제는 사회적 불평등이었다. 왕정이 무너지면서 권력은 소수의 귀족(patricii)들에게 집중되었고, 일반 시민인 평민(plebs)들은 정치적으로 소외되었다. 더욱이 경제적 어려움으로 많은 평민들이 빚에 시달렸고, 심지어 채무 노예가 되는 경우도 많았다.
이러한 갈등은 기원전 494년 '성산 분리'로 폭발했다. 평민들이 로마를 떠나 아벤티누스 언덕(일부 기록에서는 성산)에 집단 거주하며 귀족들에게 압력을 가한 것이다. 이는 로마 역사상 최초의 대규모 시민 불복종 운동이었다.
이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귀족들은 평민 호민관(tribunus plebis) 제도를 인정했다. 호민관은 평민들이 선출하는 대표로, 원로원과 집정관의 결정에 거부권(veto)을 행사할 수 있었다. 초대 호민관으로는 가이우스 리키니우스와 루키우스 알비니우스가 선출되었다.
십이표법의 제정
평민들의 또 다른 요구는 성문법 제정이었다. 기존에는 법이 구전으로만 전해져 귀족들이 자의적으로 해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기원전 451년, 십인위원회(decemviri)가 구성되어 로마 최초의 성문법인 십이표법을 제정했다.
십이표법은 청동판 12개에 새겨져 포룸 로마눔에 게시되었다. 내용은 가족법, 상속법, 소유권법, 형사법 등 일상생활의 모든 영역을 다뤘다. 비록 여전히 귀족에게 유리한 조항들이 많았지만, 최소한 법이 공개되어 예측 가능해졌다는 점에서 큰 진전이었다.
키케로는 십이표법에 대해 "모든 철학자들의 글을 모아도 십이표법의 권위와 유용성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평가했다. 이 법은 후에 로마법 발전의 기초가 되었고, 현대 민법의 원형이 되었다.
왕이 남긴 유산, 공화정이 물려받은 꿈
로마의 왕정 시대는 단순히 과거의 전설이 아니다. 그것은 서구 문명의 기초를 놓은 창조적 실험의 시대였다. 일곱 왕 각각이 남긴 유산 - 로물루스의 개방적 시민권 정책, 누마의 법치주의, 툴루스의 군사적 확장주의, 안쿠스의 상업 정신, 프리스쿠스의 도시 건설, 세르비우스의 민주적 개혁, 그리고 수페르부스의 반면교사 - 는 모두 로마가 세계 제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왕정의 종료 방식이다. 로마인들은 폭군을 몰아내면서도 기존 제도의 장점은 계승했다. 집정관은 왕의 권한을 분할하여 계승했고, 원로원은 더욱 강화되었으며, 종교 제도와 법률 체계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는 혁명이 파괴가 아닌 발전의 계기가 된 드문 사례다.
루크레티아의 죽음으로 촉발된 공화정 혁명은 단순히 정치 체제의 변화를 넘어서,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출발점이었다. "다시는 왕을 두지 않겠다"는 브루투스의 맹세는 25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민주주의 이념의 핵심으로 남아 있다.
로마는 왕이 사라진 후 오히려 더 강해졌다. 시민들 스스로가 국가의 주인이라는 의식을 갖게 되었고, 법과 제도에 대한 존중이 사회 전반에 뿌리내렸다. 이것이야말로 로마가 단순한 도시국가에서 세계 제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진정한 원동력이었다.
왕정 시대의 로마는 신화와 역사가 만나는 지점에 있다. 하지만 그 신화 속에는 인류가 꿈꿔온 이상적 공동체에 대한 열망이 담겨 있고, 그 역사 속에는 오늘날 우리가 여전히 추구하는 자유와 정의에 대한 갈망이 새겨져 있다. 로마의 일곱 왕은 죽었지만, 그들이 꿈꾼 위대한 도시의 이상은 영원히 살아 있다.